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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글은 설민석강사와 민족대표33인 후손들의 논쟁을 보다가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야사 언급은 안하려고 했습니다.

(대표야사가 설민석 강사가 얘기한 룸싸롱 얘기입니다. 태화관에서 12시에 모여서 나타나지 않는 4사람을 기다리면서 민족대표들이 막걸리를 마셨다는 야사죠. 공식적으로는 확인된바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1. 3.1 만세운동의 의의

 

3.1만세운동은 그 의의를 비폭력저항운동이나 이런 곳에서들 많이 찾지만, 개인적으로 민족대표자들이 아닌 대중들에 의해서 트리거가 당겨졌기 때문에 그 의의를 가지고, 이 운동으로 독립운동 2세대가 등장했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데 중요 의의를 가진다고 봅니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무지몽매한 민중이라는 편견도 많이 타파되었고, 일본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내외적으로 영향을 가지고 옵니다.

하여간 '이게 무슨 소리야?' 하실 분들은 계속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독립운동은?

 

다들 아시다시피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승전국 중 하나의 입장에 서게된 미국은 우드로 윌슨을 통해서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을 언급합니다.

어려운 것을 그냥 제가 쉽게 정리하면, 한마디로 패전국들 밑에 있는 식민지나 타민족들은 그들의 입장을 그들이 정할 수 있으니까 패전국들은 찍소리도 하지 말고 승전국들도 아무말 말아라라는 얘기입니다.

결론적으로 패전국인 오스만투르크, 독일,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를 승전국들이 나눠갖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어차피 미국이 못먹을 식민지라면(미국은 식민지 노선이 아니었으니까요) 다 못먹는다는 것이었죠. 

당연하지만 이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이 아닌 연합국 소속인 일본에는 해당이 안되고, 그 식민지인 우리 역시 이에 제외된, 한마디로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강대국 미국이 풀뜯어먹는 소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레닌이 우드로윌슨 이전에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도 마찬가지라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의 근간만은 이상적으로 훌륭한 얘기고, 이 얘기는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 1세대들이나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서 국내에 전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영향을 받아서 1919년에 독립선언서들이 작성, 낭독되고 독립운동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3. 독립선언서는 3월1일에 최초로 낭독되었나?

 

일단 기미독립선언서는 3월1일에 최초 낭독된 게 맞습니다.

낭독자는 원래 민족대표33인의 수장격인 손병희 선생께서 하시기로 했지만, 결국은 예상치도 못하게 정재용 선생께서 낭독하시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정재용 선생께서는 본격적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십니다.

 

기미독립선언서 이전에 그해 2월1일에 만주나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1세대 독립운동가들이 서명하고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이 것이 무오독립선언서입니다.

실제로 1919년에 일어난 독립운동의 효시격이며,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알고 계시는 유명한 1세대 독립운동가 분들은 대부분 참여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몇몇 분만 언급하면 김좌진 장군, 조용은 선생, 안창호 선생, 신채호 선생 등이 계십니다. 거기에 썩 듣기 좋은 이름은 아니지만 이승만도 등장합니다.

희안하게 무오독립선언서가 역사적으로 평가를 못받거나 언급도 안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도 2월8일에 춘원 이광수가 주축이 되서 도쿄에서 일본유학생들 위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일본의 관공서나 일본내 타국의 대사관들에게 영어로 된 독립선언서가 배달되고 거리행진이 이뤄집니다. 이광수도 나중에 변절을 하지만 이때만해도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이죠.

(실제로 조선의 3대 천재 중 하나로 유학생들로부터 대단한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4. 무오독립선언서와 2.8독립선언서의 노선은?

 

무오독립선언서에 참여하고 서명한 분들(김좌진 장군님 등등)의 면면을 보면 알게 되는데, 무장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항일투쟁하자는 성격이 강합니다.

무오독립선언서도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비폭력저항운동하고는 아주 먼 방향으로 나간 것입니다.

현실적인 내용을 얘기하고 있고 매우 강력한 어조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2.8독립선언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이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면 혈전할 것을 주문하고 그 책임은 일본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무척 단호하면서도 현실적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5. 기미독립선언서의 노선은?

 

기미 독립선언서는 사실 이상적인 내용에 가깝습니다. 원래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 선생이 초안을 낸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최남선과 몇몇 기독교계열 민족대표들에 의해서 내용은 아주 유연하며 비폭력적으로 바뀝니다.

이는 종교지도자들이 참가한 것 때문이라는 한계라는 면에서 간혹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여튼 최남선이 2월10일에 완성한 독립선언서는 내용만 보면 너무 온화한 내용이라서 일본이 과연 이 독립선언서를 어떻게 받아들일 거라고 의도했는지도 궁금해집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일본에게 용서를, 우리민족에겐 독립을, 민중들은 폭력없이, 모든 일은 공명정대하게 입니다.

일본에게 10년째 강제로 점거중이고 총독부에서는 경찰이 아닌 헌병에 의해서 치안을 운용중이던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춰보면 정말 한쪽 뺨을 때리는 도적놈에게 '내 이 모든 것을 용서할 테니 물러가거라' 하면서 다른 빰을 내미는 듯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런 너무 온화한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을 권유받고도 하지 않은 분들도 있고, 실패를 예측한 분들도, 반발로 다른 노선을 걷게 된 분들도 있습니다.

(참고로 이승만은 하와이라는 먼곳에 있어서 서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이승만은 건국통보서를 일왕에 보내는 등 매우 활봘하게 활동하는 상태였습니다.)

 

 

6. 독립선언서 작성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천도교에서 해외의 독립선언서 집필과 발표에 영향을 받아서 국내에서도(무오독립선언서와 2.8독립선언서는 모두 국외입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독립을 선언하기로 계획합니다.

그리고 그 주축은 손병희 선생이십니다.(천도교는 손병희 선생이 갑오군란 이후 여러일들을 겪으시면서 동학세력을 추려모으고 근대화 시키면서 붙인 이름입니다.)

독립선언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 천도교는 다른 단체와 연합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천주교 및 기독교, 불교, 유림 등에 함께할 것을 권하는데, 의사가 맞아서 같이 하게 된 쪽이 기독교와 불교가 됩니다.

유림은 장구한 조선 세월 동안 붕당지어 패를 나누었듯이 여기서도 패가 갈립니다. 상투 자른 자들과는 뜻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부류와 죽을 자리 찾았으니 한번 해보자는 부류로 말이죠.

다만 유림은 의견이 늦게 조율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작성과 서명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침탈로 인하여 정신을 못차리를 상황이었기에 참여하지 않으려다가 만해 한용운 선생을 비롯해서 도합 두 분이 참여하게 되고요.

 

그렇게 해서 손병희 선생과 천도교 측에서 초안을 잡은 안을 가지고 회의를 했는데, 기독교 계 인사들로 부터 너무 과격하고 비폭력저항운동과는 맞지 않다고 지적을 받고 최남선(민족대표33인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 중의 하나라서 그런지 여기저기 많이 등장합니다)이 독립선언서를 다시 작성합니다. 그리고 역시 3대 천재 중 하나인 춘원 이광수가 교정을 봅니다. 

이 내용이 만해 한용운 선생께서 보시기에 너무 온건하여(실제로 5번에서도 언급했지만 내용이 정말 온건하고 이상적입니다) 바꿀 것을 주장하나 힘을 실어줄 편이 없어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독립선언서가 작성되고 초안이 완성 된 이후 그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이 이 독립선언서에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모으게 됩니다. 그래서 민족대표33인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죠. 즉, 처음부터 33인이 그 자리에서 합시다하고 하게 된 것이 아니고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종파별로 8명씩), 불교 2명으로 인원수만 정해진 상태에서, 초안 작성 후에 그 인원수에 해당 하는 만큼 정족수를 끌어모은 것입니다. 그런데 끌어모으다보니 인원수가 차고 넘치게 되어서 민족대표 48인이 됩니다.

추후 48명 중 대부분은 재판에 회부되고 문초를 겪습니다.

 

 

7. 독립선언서 작성 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나?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자 이 독립선언서를 각지로 보내기 위한 일들과 지정된 명수에 맞도록(천도교 15, 기독교는 종파별로 8) 함께 참여할 인물들을 포섭하기 위한 행동이 벌어집니다. 

예를 들면 나중에 변절하는 박회도의 경우 상상이상의 활동을 벌여서 김창준, 이갑성, 이필주를 끌어들입니다.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줘서 이화학당(유관순 열사님도 여기서 등장하시죠), 연세 학당 등에서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여 탑골공원에 모이도록 하고, 지방의 기독교 쪽에도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자금을 모으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촉발시킨 트리거로서의 역할을 한 정재용 선생도 상경하게 됩니다. 이 당시 경성에 독립선언에 참여하기 위해서 준비중인 인원수는 물경 5천이상이 됩니다.

이 5천의 인원 중에는 위에 언급한 유관순 열사도 계시고요. 하여간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등사기를 이용해서 복사하고 이를 경성시내 곳곳에 퍼트릴 계획도 수립합니다.

 

그리고 이 일과는 별개로 고종의 장례식도 활발히 준비되어서 약 50만의 민중들이 경성에 모여들게 됩니다. 

경성은 한마디로 고종의 독살설에 분개한 50만명과 독립선언에 뜻을 두고 있는 5천이상의 지사가 모인 용담호혈이 됩니다.

 

 

8. 2월 28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2월 28일 저녁에 민족대표 33인 중 경성에 있는 이들은 손병희 선생 댁에서 회합을 갖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희도가 경성의 상황에 우려를 표합니다(7번에서 설명했듯이 너무 많은 분노한 민중들이 경성에 모여들었고, 너무 많은 수의 학생들과 종교인들로부터 관심을 받게 되버렸고, 학생들 자체적으로도 독립선언서를 등사기로 복사하여 서울역 등지에 뿌릴 준비를 하기 까지 했습니다) 

이에 폭력적 사태로 발전할까 걱정된다면서 3월1일 2시에 탑골공원에 가지 않기로 주장하고 이 것이 나머지 인사들에게 받아들여집니다.

 

 

9. 3월1일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3월1일 아침에 정재용 선생 등 몇명은 박희도로 부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 폭력사태가 벌어질 것이 걱정되서 민족대표33인은 그 자리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실망합니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습니다.

정오가 넘자 탑골공원에는 이미 수천의 인파가 운집합니다. 이는 대부분 경성을 포함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종교인들과 학생들입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이들은 작은 단체나 개개인이 운집한 것이기에 구심점이 되어서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인사도 없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그 구심점의 역할을 하기로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약속한 2시가 다 되도록 민족대표33인은 나타나지 않고, 이윽고 2시가 넘어섰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당황하고 흥분에 찬 군중의 소요 끝에 결심이 선 정재용 선생이 팔각정 위에 올라서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라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합니다.(이 육성테이프도 얼마전 발견됐습니다) 이때 독립선언서 앞에 '조선' 두 글자를 붙여 읽어서 조선독립선언서라고 낭독합니다.

그리고 낭독 후에 시키지도 않았는데 군중들로부터 대한독립만세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고 만세운동이 개진되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이들 중 누구도 민족대표 33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탑골공원 지근거리의 태화관에 있는데도 오후 3시가 넘어서도 이들을 찾지 못합니다.

 

반대로 태화관에 12시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지방에서 올라오기로 한 4명을 기다리다가 오후 3시가 되어서도 4명이 오지않자 참석한 인원들로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오후4시에 행사를 마치고 총독부에 자수합니다.

 

 

10. 3월 1일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탑골공원에서 정재용 선생이 오지않은 민족대표33인에 당황한 5천 군중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시작한 후에, 그 운동은 삽시간에 경성에 퍼집니다. 학생들도 준비한 복사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만세운동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총독부는 이 일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학교는 휴교시키고, 참여한 자들은 잡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뿌려진 독립선언서는 인편이나 편지들을 통해서 지방 각지로 전달되고 지방에서도 만세운동의 트리거가 당겨집니다.

거기다 휴교령과 체포령을 피해서 지방이나 고향으로 피신한 독립운동 2세대들(대표적으로 유관순 열사분이 계시죠.)에 의해서 운동의 확산도 빨라지고 저항도 조직적이고 유형적으로 변모합니다.

일예로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는 철시투쟁을 하거나, 파업투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 파업투쟁으로 경성의 대부분의 공장이 가동을 중지합니다.

농민들이 농사를 멈추는 방식으로 투쟁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일본입장에서 식량과 생산의 전초기지격인 조선에서 이런 류의 투쟁은 매우 당황스러운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유형적으로 경찰서 등을 습격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총독부는 이에 대단한 위기감을 느끼고 강력한 대응을 하는데, 적지 않은 사람이 죽고 다치며 구속됩니다. 총독부 공식집계로도 사망이 8천여명, 부상이 1만6천여명입니다.

특히나 3월부터 6월까지의 독립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총독부는 천인공노할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데, 제암리 학살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수원 화성 제암리의 장터에서 독립운동이 발발하자 현병대가 출동하여 전원을 한 곳에 모이게 한 후, 이중에 성인 남성을 모두 교회당에 몰아넣고 총살한 사건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이 없게하기 위해 확인사살로 총검으로 찌르기 까지 했으며, 마지막에는 교회당 전체를 방화합니다.

이 사건은 선교사들 및 외국인들에 의해서 해외에 보도가 되고 국제사회의 비난 뿐 아니라 일본내에서도 이런식으로는 안된다는 사설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11. 구속된 주도자 48인은 어떻게 되었나?

 

독립선언서와 독립선언문 낭독을 계획한 민족대표33인과 그에 주도적 역할을 한 분들을 포함해서 도합 48인은 20개월간 공판끝에 징역 1~3년을 선고 받습니다.

(공판 중에 취조로 인하여 양한묵 선생께서 작고하십니다)

 

 

12. 이 일은 국내외 독립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그전까지의 독립운동은 상해를 거점으로 하는 다수의 해외파와 경성(=한성)을 거점으로 하는 국내파로 이원화 되어있었습니다. 이들의 매개체로는 해외파에 자금지원을 하던 동화약품(현재도 있는 그 회사 맞습니다.) 등이 있었습니다.

국내 각지에서 운동자금을 모아서 동화약품 등에 전달하면 이것이 해외파에게 다시 전달되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3.1운동을 계기로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인식하여서 다수의 해외파가 힘을 모아, 임정수립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연해주 일대에서 수립된 '대한 국민 의회', 상해에서 설립된 '상해 임시 정부'가 대표적입니다.

한성지도부는 이때 민족대표들과 주도적 인물들의 구속과 공판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해외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을 주문하나, 추후 '한성 정부'를 설립하고 그해 9월 이 모두가 합쳐져서 1919년 상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국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됩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때 임정수립에 주도적인 단체에서 한곳도 빼놓지않고 이승만을 총리나 장관 후부로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45세 이승만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뉴라이트쪽에서 주장하는 건국년도 논란도 사실 부질 없는 것이 이 당시 이승만이 국외에 보낸 서류에서 이미 건국했다고 밝혔기에 이것만 봐도 1919년이 대한민국 건국년도 가 됩니다.

 

임정 수립 외에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도 부쩍 힘을 받게 됩니다. 교과서에 꼭 나오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와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는 모두 이 즈음에 발생한 일입니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 덕분에 탑골공원에 모인 지사들 중에서 독립운동 2세대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중에 탑골공원에 나타나지도 않은 민족대표33인의 비폭력저항운동의 한계를 목도하고 실망한 이들이 의열단, 철혈단 등 무장투쟁단체를 조직하는데 참여하게 됩니다.

영화 암살에서 나온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 역시 상당수 인물들이 3.1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입니다.

철혈단 역시 나창헌 선생 등 참여 인사 상당수가 3.1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입니다.

 

 

13. 이 일은 일본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일본은 3월6일이 될때까지만 해도 이 일에 대해서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아사히 신문만 봐도 '돈을 준다는 말에 운집한 민중들의 소요사태' 정도로 보도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운동이 계속 확산되고 일이 커지자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강경하게 진압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위에서 언급한 제암리 사건등 다수의 학살사건들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런 대응이 해외에 보도되어 비판에 시달리게 되며, 일본 내에서도 무력만으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들이 대두됩니다.

폭력에 의존하는 무단정치에 대한 비판여론 역시 일어나고 정당 내각이 등장하게 됩니다.(이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합니다)

또한 하세가와 총독도 경질되고 비교적 온건파인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새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문화정치'의 시대가 막을 올립니다.

3.1운동이후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된 일본내에서 4월달에 되자, 현재 식민지 지배 방법은 실패했다는 의견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요시노 사쿠조가 있는데,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주도한 인물중 하나입니다. 이 사람이 사설을 쓰는데, 이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조선사람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한다. 특히 교육 차별을 철폐한다.

둘. 총독부가 헌병을 통해서 치안을 유지하는 무단정치를 폐지한다.

셋. 일본인과 조선인의 동화정책을 포기한다.

넷. 언론의 자유를 준다.

 

당연하지만 조선을 식민지로부터 독립시켜준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냥 조선을 좀 더 성공적으로 경영하려면 이래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주역일 정도로 영향력이 있던 요시노 사쿠조의 의견은 사이토 마코토 등에 의해서 취사선택되서 문화정치로 변질됩니다.

문화정치 중 중요한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헌병제도를 폐지하고 경찰제도로 변경한다.

둘. 조선인들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분할 통치를 실시한다.

셋.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동화교육을 펼친다.

넷. 언론 출판의 자유를 어느정도 용인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3.1운동으로 크게 데인 일본이 이때부터 작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헌병제도를 폐지하고 경찰제도로 넘어가는 것은 어찌보면 무력을 기반으로 하는 무단정치가 폐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대다수의 헌병들은 그대로 경찰제도에 편입됩니다.

그리고 헌병제도 당시 6천여명이던 치안병력은 경찰제도가 되면서 2만여명으로 불어납니다. 결과적으로 1개의 마을에 무조건 1개의 주재소가 배치하여서 더욱 철저히 민중을 관리통제합니다.

 

다음 분할통치는 무엇인가 하면, 일본인들이 차지하던 관리직에 조선인을 일부 배치해서 이들로 하여 조선인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불평불만분자를 조속히 제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동화교육은 초등교육부터 일본어교육 및 일본학제에 따라 교육시켜서 조선인들을 황민화 시켜서 내지인(=일본인)과 조선인을 하나로 동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들여다 보면 조선어 교육시간은 주에 2~5시간인 반면, 일본어 교육시간은 9~10시간이 됩니다.

 

언론출판의 자유는 그나마 좋은 것으로, 그 전까지 조선에서는 일본인이던 조선인이던 총독부를 제외한 그 누구를 막론하고 언론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걸 숨통을 좀 틔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천지, 신생활 등이 창간됩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농업, 공업, 광업의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이 극대화 됩니다. 조선내에서의 무단정치가 그 색채가 살짝 옅어지자 그전까지와 달리 일본 자본에 의한 침공이 본격화 됩니다.

일본자본은 들어와서 토지 뿐 아니라 농업/공업/광업에 대해서 막강항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조선의 산업이 급격히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산업전반에 걸처서 일제의 수탈정도가 급격히 커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일본 덕에 근대화 공업화 되었다는 주장은 보고 싶은 쪽만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 옥고 후 민족대표 33인은 어찌 되었나?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천도교 인사를 제외한 기독교 인사들 중 상해로 망명해서 임정활동중인 김병조 선생을 제외한 대다수는 민중계몽/교육/기독교선교활동으로 활동방향을 잡습니다.

천도교 인사 중에서 옥고 후 작고한 손병희 선생을 제외한 분들은 임시정부활동/항일운동/민중계몽/천도교 활동으로 활동방향을 잡습니다.

불교 인사 중 만해 한용운 선생은 다들 알다시피 '님의 침묵'같은 저항문학활동을 하시고 그 외에는 신간회 같은 단체를 통해서 항일 운동을 하십니다.

백용성 선생께서도 불교계 자금 등을 모아서 상해로 보내거나 인물(윤봉길 의사 등등)을 상해에 보내는 등의 항일 운동 활동을 하십니다.

 

 

15. 민족대표33인중 한용운만 빼고 다 변절했다던데?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공식적인 변절자는 박희도, 최린, 정춘수 3명입니다. 

 

개인적으로 '한용운만 빼고에서'와 같이 한용운 선생이 절개를 지킨이로 강조되는 것은 여러 일화나 야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소개를 하면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민족대표33인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은 변절하게 됩니다. 이에 만해 한용운 선생이 최남선은 죽었다며 제사를 지냈다는 야사는 많이 회자 된 야사입니다.

그 외에도 조선 3대 천재라고 하는 이광수, 최남선, 홍명희와 만해 한용운 선생이 모두 친분이 있었는데, 홍명희 선생이 변절자인 이광수, 최남선과도 계속 교류를 했는데 만해 선생이 홍명희에게 내가 알던 춘원과 육당은 죽었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많이 회자 되는 야사입니다.

 

또한 14번에서 언급했듯이 민족대표33인의 적잖은 수가 출소후에 보다 더 본격적인 독립운동 보다는 민중계몽이나 교육, 국내외에서 기독교선교와 같은 활동을 했으나, 만해 선생은 항일활동을 계속한 것이 부각되어서 와전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기독교 단체의 지도자 중 적잖은 수가 친일적 행적을 보였다는 점에서 기독교계 인사가 16인이나 포함된 민족대표33인의 폄훼가 시작되지 않았나 합니다.

(감리교 소속의 박희도와 정춘수 역시 이 시기부터 친일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친일에 동조하지 않는 기독교계 인사들은 옥고를 치르거나 재야로 내려가게 됩니다.)

 

 

16. 변절자들은 어찌 되었나?

 

결론만 놓고 보면 종교라는 것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15번에서 박희도를 비롯해서 기독교 계에서 적잖은 변절자들과 친일부역자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당연히 반민특위에 이들은 회부됩니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계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의 권력 유지에 있어서는 좋은 방향이 아니었기에 이승만은 이들을 사면하고 석방합니다.

기독교계 변절자, 친일 부역자 중에서 사면 석방 이후에 잘먹고 잘살고 사학재단도 만들고 떵떵거리고 살아간 케이스들도 적지 않습니다.

결국 그리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하며 다수로부터 임시정부의 요직을 추천받던 이승만이 결론적으로는 친일청산을 못하게 하면서 나라를 망친 것입니다.

 

 

17. 민족대표 33인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3.1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민족대표 33인이 맞지만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않았고, 이에 당황한 군중 앞에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읽으면서 3.1운동의 트리거는 정재용 선생이 당기셨고, 운동의 파급도 33인의 의도나 예측과는달리 유관순 열사와 같은 학생들과 민중들로 부터 인편이나 편지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무오독립선언서는 먼저 선언낭독되었고 그 참여자들 역시 매우 활발히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이라는 일관된 목표를 향해서 나간 점도 있습니다.

심지어 무오독립선언서에 참여한 분들의 평균수명은 민족대표33인에 비해서 5년이상 짧습니다. 그만큼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고 위험을 짊어졌다고 봐야겠죠.

 

그런데 지금돌이켜 보면 그들보다 민족대표33인이 더 기억에 남고, 심지어 과거 교과서로 민족대표 33인이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을 벌인 것으로도 배운 분들도 있습니다.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이렇게 배운 분들이 대다수일겁니다. 그래서 90년대 이전의 교과서로 공부한 분들은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 당시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하는 분들도 계시겠고요.(반대로 그 당시 이에 비판적 사관을 가진 역사선생님들은 엄청나게 비판을 하셔서 기억에 남으시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교과서나 초등생을 위한 역사서들(용선생 한국사 등등)에도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것은 맞지만, 대중 앞에 나서지 않아서 군중들은 당황했고, 3.1운동은 당황한 민중 속에서 용감한 청년(30대도 청년입니다)이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고 정확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0~30년 사이에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과거에는 민족대표33인을 3.1운동의 이념적 상징, 그러니까 지도자로보고서 그 역할을 강조하는 견해가 더 컸다면, 지금은 민족대표 33인을 민족자결주의와 비폭력저항운동만 생각하다가 그들 스스로를 태화관에 가둬서 탑골공원의 민중과 격리시킨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견해가 커졌다는 것이겠죠.

결국 현재에는 3.1운동의 이념적 상징을 민족대표33인에서 찾지 않고 그 당시 3.1운동을 전개했던 수많은 민중에게서 찾으려는 시도가 그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출처 :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353049&sca=%5B%EC%83%9D%ED%99%9C%EC%83%81%EC%8B%9D%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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